대법 "업무상 재해, 의학적 입증 없어도 인정"

[보험매일=이정애 기자] 근로자의 사망원인인 질병이 업무와 직접적 연관이 없더라도,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한 악화 가능성도 업무상 재해의 인정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H통상에서 근무 중 사망한 심모씨의 부인 전모씨가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던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심 재판부인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다고 5일 밝혔다.

재판부는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한 뇌혈류 상승이 뇌동맥류라는 망인의 기존 질환에 작용해 사망원인인 뇌동맥류 파열을 유발했다고 추단할 수 있다"며 "심씨의 과로 또는 스트레스와 사망원인 간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업무상 재해의 판단 근거에 대해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 관계가 없더라도 적어도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겹쳐져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켰다면 인과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2008년부터 H통상에서 근무해 온 심씨는 지난 2010년 10월 출근 준비 중 구토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다. 심씨는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일주일 만에 사망했다. 사망진단서상 사인은 급성 호흡부전 증후군, 뇌출혈, 뇌동맥류 파열 등이다. 심씨가 사망한 뒤 심씨의 아내인 전씨는 이듬해 3월 "심씨의 사망은 업무상 재해"라며 H통상에 유족급여와 장례비를 청구했다.

심씨는 사망 5개월 전인 2010년 6월까지 주6일씩 근무하며 평일에는 오전 6시~밤 9시30분까지 15시간30분, 토요일에는 오전 6시~오후 2시까지 8시간씩 근무했다. 큰딸이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특별수당을 받기 위해 새벽과 야간에 3시간씩 근무를 추가로 하기도 했다. 식사시간을 제외해도 주당 73.5시간이 넘는 고강도 업무에 시달린 탓에 사망에 이를 정도로 몸이 상했다는 것이다.

H통상은 심씨가 사망 전날 업무 강도가 통상적 수준을 넘지 않았고,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로 인한 뇌동맥 파열 등이 일어났다고 볼 만한 이유가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